술 : 술을 사랑한다.

2019. 12. 26. 12:56쓰고싶은 욕심/짧은 글도 써요

 

 

 

 

 

술 : 술을 사랑한다.

아버지의 감정을 술로 배웠다.

 

어찌 보면 지나친 그의 애주력은 불행하게도 나에게 유전되었다.

 

‘월급’을 받는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중독됐을 것이다. 나는 흔히 말하는 ‘반주’의 중독자이며 ‘소주’파다. 나만 몰랐던 내 수식어는 '애주가'다.

 

술과 마주한 첫 기억은 ‘할아버지’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남아있는 기억 조각 중 늘 막걸리를 드시던 그가 있다. 안채에 밥상과 함께 배달됐던 막걸리는 ‘도대체 무슨맛일까?’하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언젠가 맡아봤던 빈병의 냄새는 ‘시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할아버지도 ‘애주가’ 셨다.

 

그의 불행함을 내 아버지가 받았다.

 

현재도 소맥파인 아버지는 예전부터 폭탄주를 사랑하셨다. 다만 할아버지와 달랐던 느낌이 있다. 아버지는 감정을 술에 풀었던 것. 기쁨을 표현하기 위한 술, 행복한 술, 그리고 지치고 힘든 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몇 안 되는 아버지의 ‘슬픈 술’이다. 영원한 이별을 마주한 그의 술잔에는 한 평생 겪은 그의 슬픔이 맺혀 있었다. 할아버지도 그랬을지 모르나 그땐 내가 너무 어렸다. 그 날 아버지의 술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겠습니다.’라는 그의 의지였고 '조심히 가세요'라는 그의 배웅이었다.

 

그렇게 나는 술을 배웠다. 그의 불행함을 나도 받았다.

아니, 닮아 있었다. 당신의 감정을 닮았다.

 

아버지와 나를 제외한 어머니와 남동생은 술을 즐기지 않는다. 유독 나만 즐기는 형국이다.

아빠와 딸의 경우 닮음이 많다고 했던가. 다른 것도 많은데 하필 술을 닮았나. 심지어 나는 아버지보다 주량이 세다. 주량이 세면 취하는데 돈이 많이 든다. 월급의 배수를 술값으로 탕진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취한 적은 손에 꼽는다. 정신력이 특출 난 것도 아닌데 왜 취하지 않는지 원망스러운 몸이다. 아마 내 간은 비브라늄 코팅이 되어 있을 것이다.

 

모두의 감정을 함께하고 싶을 때 나는 술을 찾는다. 빈도가 잦은 것이 문제.

몇 안 되는 나의 사람들과 마주한 어느 날을 생각한다. 잔 끝에 일렁이는 감정을 모조리 삼킨다. ‘그랬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사람들이 긍정하는 술의 분위기. 그것을 사랑한다. 그 자리들에 나의 감정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최후의 보루리라. 감정이 정리되면 이별해야 하지 않나. 아직은 술과 이별하고 싶지 않다.

 

기쁨의 술을 마주한 날은 감정의 폭이 넓어진다.

행복에 취한 술잔은 소리도 청아하다. 당신이 행복하니 나도 좋다. ‘축하해’라는 말을 당신에게 건넬 수 있어서 좋다. 당신의 기쁨을 별 것 아닌 나와 소박하게 보내주어 고맙다. 앞으로도 마주하게 될 자리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자리가 유지되는 한 나는 당신에게 용기를 줄 것이다. 

 

슬픈 날의 술은 이상하리 만큼 쓴맛이 크다.

어쩌면 억지로 쓴맛을 느끼려 노력하는 듯하다. 그렇게라도 너를 핑계로 감정을 쏟고 싶은 것이리라. 작은 위로를 건네는 술잔이 시간이 지나면 고마움이 된다. ‘이렇게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힘내’. 술을 핑계로 만나고 위로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생의 큰 선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인생의 몇 안 되는 감정의 나날을 ‘술’ 하나로 모이고 공유한다는 것이. 아마 술의 가장 큰 가치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애주가’가 되었다. 사람과 사람을 엮어주는 최고의 매개체다.

 

‘숙취’는 전날의 감정을 다시 상기하게 한다. 원래 숙취가 없는 편이다. 허나 가끔 찾아오는 숙취는 전날 내가 얼마나 많은 감정을 삼켰는지 되짚게 한다. 대신 ‘좀 적게 마실 걸’ 하는 후회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술’과 타협한 것이다. 녀석과 함께한 지난 시간을 후회하지 않기로 말이다.

 

‘혼술’의 매력도 있다. ‘금주’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오늘은 나와 우리의 ‘술’을 말한다. 사람들은 건강과 돈, 기타의 이유로 부정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술은 고마운 존재다. 그렇게 애주가가 되었고 일상에 술이 녹아있다.

 
물려받은 불행은 어느덧 불행을 넘어선 어떤 것이 되었다.
그 불행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는 불행이 아니다.
넘치는 감정의 흐름을 물려준 그들에게 감사하다.

 

추적이던 비가 그쳐 버렸다.

그쳐버린 비가 아쉬워 한잔 해야 할 듯 하다.

지난 당신의 감정을 담아 술 한 잔 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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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맛으로 소주를 마셔?’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아직도 그 감정을 못 느꼈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