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lti-persona' 멀티 페르소나 : 가면이라 칭해져야 하는가.

2019. 12. 23. 14:53쓰고싶은 욕심/짧은 글도 써요

 

 

 

 

 

'multi-persona'

멀티 페르소나 : 가면이라 칭해져야 하는가.

 

‘멀티 페르소나’.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트렌드 코리아’에 수록된 ‘2020년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다. 복잡하고 개인화된 ‘다매체 사회’로 변하면서 페르소나가 중요한 개념으로 떠올랐다 한다.

 

멀티 페르소나는 한 명의 자아가 가진 다양한 ‘사회적 가면’을 칭한다.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 배우들이 썼던 가면이다. 심리학 용어로도 사용되고 있으며 영화와 게임 등 다양하게 적용된다. 인터넷의 숨겨진 부계정, 편집된 SNS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다. 단점은 남발로 인한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성격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 있다. ‘사실 내 진짜 성격은 따로 있어’라고 말한 적 있다. 타인이 본 외적 성격은 ‘진짜 성격’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본 당신의 성격은 거짓 성격인가?

 

오늘의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힌다.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겠지만 그럼에도 말하겠다. 나는 외적인 성격을 ‘가면’이라 칭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숭과 가식 또한 내가 지닌 성격의 일부다. ‘다중적 자아’는 왜 가면이 되어야만 했는가.

 

대중들은 왜 은둔형 단어를 택했나. 물리적 장치로써의 가면이 아닌 내면의 자아를 설명하는 기준에 과연 적합한 단어인가. 대중은 스스로를 숨기는 행위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나를 숨기는 세상에 동조하고 있다. 적재적소의 성격은 언제부터 사회적 가면을 쓴 사람으로 위장되어야만 했을까.

 

‘가면’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본다. ‘밝고 유쾌한’이라는 단어는 내가 가진 대표적인 가면이다. 속은 썩고 곯았다. ‘애써 밝은 척한다’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쓴 적 있다. 그런 줄로만 알고 살았다. 그 또한 내 성격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자아는 거짓 자아가 아니다. 가면도 나의 성격이다. 업무상 필요한 가면은 ‘매너’이며 연장자를 대하는 가면은 ‘예의’다. 낯선 타인을 대할 때 평소보다 높은 억양과 일종의 친절은 그들이 빨리 적응하도록 베푸는 ‘호의’이자 ‘배려’다.

 

이 단어를 통해 내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다. 하지만 타인보다 부족한 가면의 수, 상황에 맞지 않는 가면을 가졌다고 해서 나를 억압하지는 말아야 한다. 성격이 살짝 모나고 상황 분석력이 떨어진다 한들 그것이 자아를 갉아먹을 정도로 잘못은 아니라는 소리다. 역으로 모든 상황에 잘 맞는 성격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능력이자 매력이며 성격이다.

 

사회적 가면은 ‘메이크업’을 받은 자아다. 화장을 한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 비해 조금 더 다정하고, 활기차며 친절할 뿐 그것도 결국 ‘나의 성격’에서 파생된 일종의 성격일 뿐이다. 스스로를 공격하지 말았으면 한다. 내가 표현하는 모든 성격은 나의 자아임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다양한 성격을 써 내려가자. 조용함과 시끄러움이 중복될 수 있다. 편안함과 까칠함이 맞닿는다. 모든 것이 나의 성격이다. ‘나’를 이해하고 존중하자. 개인의 성향이 존중받기 시작한 사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가면’을 강요한다면 모순 아닌가.

 

'자기소개서'는 흔히 ‘자기 소설서’로 통한다. 나를 꾸미는 단편 소설이라 칭한다. 자기소개서에서 빠지지 않는 대목이 있다. ‘성격’에 관한 것이다. 기억하자. 우리는 어떤 성격도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색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이는 가면이 아닌 본디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은 과유불급이다. 나의 여러 가지 성격을 사랑하되 지나친 꾸밈과 거짓은 없어야 할 것이다. 멀티 페르소나도 한 명의 다양한 정체성을 논한 것이다. 이는 과장과 확대가 아니며 거짓을 논한 것이 아니다. 사회적 가면을 이용하여 '충'이 되지 말자. 이들은 그로 인한 역효과를 걱정하고 있다.

 

여러 가지의 얼굴을 가진 나를 다양하게 표현하자. 그렇게 성숙하고 발전하자.

모습을 숨긴 채 글을 쓰며 또 하나의 자아를 찾은 나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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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개인적이고 너무나도 광범위한 범주의 단어를 작은 견해로 풀어나가니 걱정이 앞서는 글이다.

결론적으로 ‘다양한 나의 모습을 사랑하자’는 것이니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우려)